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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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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헬름 2세는 1859년에 태어나 1941년에 사망한 독일 제국 마지막 황제이자 프로이센 국왕이다. 그는 선천적인 장애와 독특한 성격으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할아버지 빌헬름 1세의 영향을 받아 군대를 좋아하게 되었다. 1888년 즉위 후,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해임하고 친정을 시작하여 세계 정책을 추진했으나, 외교적 갈등을 겪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부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실질적인 권한을 잃었고, 독일 혁명으로 인해 퇴위하여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망명 생활 중 나치즘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사망했다. 역사적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원흉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객관적인 연구를 통해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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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2세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중년의 수염을 기른 빌헬름 2세 사진
1902년의 빌헬름 2세
이름프리드리히 빌헬름 빅토어 알베르트
출생 이름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자
출생일1859년 1월 27일
출생지베를린 왕세자궁,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사망일1941년 6월 4일
사망지후이스 도른, 도른, 네덜란드
매장일1941년 6월 9일
매장지후이스 도른, 도른
종교루터교 (프로이센 연합)
서명Wilhelm II, German Emperor Signature-.svg
통치 정보
작위독일 황제, 프로이센 국왕
재위 기간1888년 6월 15일 – 1918년 11월 9일
이전 군주프리드리히 3세
다음 군주군주제 폐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
섭정오토 폰 비스마르크
레오 폰 카프리비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슐링스퓌르스트
베른하르트 폰 뷜로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게오르크 미하엘리스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
막시밀리안 폰 바덴
섭정 유형총리
가문 정보
왕가호엔촐레른 가문
아버지프리드리히 3세
어머니빅토리아 폰 작센코부르크고타
배우자아우구스테 빅토리아 (1881년–1921년)
헤르미네 로이스 폰 그라이츠 (1922년–1941년)
자녀빌헬름
아이텔 프리드리히
아달베르트
아우구스트 빌헬름
오스카르
요아힘
빅토리아 루이제

2. 어린 시절과 결혼 생활

빌헬름 2세는 1859년 1월 27일 베를린의 황태자궁전에서 프리드리히 3세와 빅토리아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70][71] 그는 태어날 때 역위 상태였으며, 난산으로 인해 왼쪽 팔을 심하게 다쳤고, 상완신경총 손상으로 어깨 근육 마비가 발생하여 왼팔이 오른팔보다 약 15cm 짧았다.[75][76] 이로 인해 평형 감각에도 어려움을 겪었다.[75]

1867년 8세의 빌헬름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와 함께


어머니 빅토리아 공주는 아들의 장애를 고치고자 노력했고, 앨버트 공의 자유주의 사상을 가르쳤다.[76][81] 그러나 빌헬름은 성장하면서 할아버지 빌헬름 1세의 영향으로 군대를 좋아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강했으며, 러시아 제국 외상 알렉산드르 고르차코프는 어린 빌헬름을 보고 "독일의 중심 기관이 되어 세계에 그 위엄을 보일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73]

빌헬름은 무뚝뚝하고 무례했으며, 부모,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76][80][81] 그는 어머니가 영국 자유주의 정신으로 자신을 교육하려는 것에 저항했고, 오히려 교사들의 전제적인 통치 지지에 동의하며 점차 '프로이센화'되었다.[91] 반면, 할아버지 빌헬름 1세는 그를 매우 아꼈고, 빌헬름 또한 할아버지를 본보기로 삼아 성장했다.[92][93]

여섯 살 때부터 게오르크 에른스트 힌츠페터에게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80] 1874년 카셀의 프리드리히스김나지움에 입학하여 1877년 졸업했다.[71][88] 이후 본 대학교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29]

카셀에서 18세 학생 시절의 빌헬름 왕자


1909년 함부르크 하겐베크 동물원에서 에티오피아인들과 이야기하는 빌헬름


화려한 군복을 좋아하는 빌헬름


빌헬름 2세는 격렬하고 편견이 심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아시아인에 대한 극단적인 황화론자였으며, 의화단 사건 진압을 위해 출정하는 독일군에게 "자비는 불필요하다"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110][344]

역사가들은 빌헬름 2세의 성격이 그의 통치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1881년 2월 27일, 빌헬름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공녀와 결혼하였다.[97] 빌헬름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와의 결혼을 희망했지만, 홀슈타인 가문은 독일 제국 건설에 있어 배척받은 가문이었기 때문에 반대가 강했다.[96] 이에 대해 빌헬름은 "이 결혼이 성립한다면 홀슈타인 가문의 호엔촐레른 가문에 대한 악감정도 사라질 것이다. 독일 제국을 위해 이보다 더 기쁜 혼인은 없지 않은가."라고 반론하여, 혼인을 허락받았다고 한다.[97] 1880년 6월 3일에 혼인이 성립되었고, 두 사람은 포츠담의 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90]

빌헬름 왕자와 아우구스타 공주의 결혼 기념 메달, 앞면


뒷면에는 중세 의상을 입은 부부가 프로이센,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방패를 든 3명의 무사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나와 있다.


빌헬름 2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빌헬름 2세와 아우구스타 빅토리아는 슬하에 빌헬름, 아이텔 프리드리히, 아달베르트, 아우구스트 빌헬름, 오스카르, 요아힘, 빅토리아 루이제 등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71]

"도나"라는 애칭으로 친근하게 알려진 아우구스타 황후는 빌헬름 2세의 끊임없는 동반자였으며, 그녀가 1921년 4월 11일에 사망한 것은 엄청난 타격이었다. 또한, 그들의 아들 요아힘이 자살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두 번째 부인 헤르미네와 그녀의 딸, 헨리에테 공녀


1921년 아우구스테가 죽자, 이듬해 1월 빌헬름은 헤르미네 라이우스 공녀를 도른으로 초대했다. 빌헬름은 35세의 헤르미네에게 매우 매력을 느꼈고,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을 매우 즐겼다. 빌헬름의 군주제 지지자들과 그의 자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1922년 11월 5일 도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34][35]

2. 1. 유년기와 성격

빌헬름 2세는 1859년 1월 27일 베를린의 황태자궁전에서 프리드리히 3세와 빅토리아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70][71] 그는 태어날 때 역위 상태였으며, 난산으로 인해 왼쪽 팔을 심하게 다쳤고, 상완신경총 손상으로 어깨 근육 마비가 발생하여 왼팔이 오른팔보다 약 15cm 짧았다.[75][76] 이로 인해 평형 감각에도 어려움을 겪었다.[75] 현대 의학적 평가에 따르면, 출산 시 저산소증으로 인한 경미한 뇌 손상이 과잉 행동, 변덕스러운 행동, 집중력 저하, 사회성 저하를 야기했을 수 있다.[17][18]

어머니 빅토리아 공주는 아들의 장애를 고치고자 노력했고, 앨버트 공의 자유주의 사상을 가르쳤다.[76][81] 그러나 빌헬름은 성장하면서 할아버지 빌헬름 1세의 영향으로 군대를 좋아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강했으며, 러시아 제국 외상 알렉산드르 고르차코프는 어린 빌헬름을 보고 "독일의 중심 기관이 되어 세계에 그 위엄을 보일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73]

빌헬름은 무뚝뚝하고 무례했으며, 부모,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76][80][81] 그는 어머니가 영국 자유주의 정신으로 자신을 교육하려는 것에 저항했고, 오히려 교사들의 전제적인 통치 지지에 동의하며 점차 '프로이센화'되었다.[91] 반면, 할아버지 빌헬름 1세는 그를 매우 아꼈고, 빌헬름 또한 할아버지를 본보기로 삼아 성장했다.[92][93] 그는 변태적인 엽색 행각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가 매춘부에게 보낸 편지는 비스마르크의 아들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비밀리에 입수하여 사후에 공개했다.[349]

1876년, 빅토리아 여왕은 외손자인 빌헬름 2세에게 생일 선물로 킬리만자로를 선물했다. 현재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선은 영국이 킬리만자로를 독일에게 양도하면서 그려졌다.

여섯 살 때부터 게오르크 에른스트 힌츠페터에게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80] 1874년 카셀의 프리드리히스김나지움에 입학하여 1877년 졸업했다.[71][88] 이후 본 대학교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29]

빌헬름 2세는 격렬하고 편견이 심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아시아인에 대한 극단적인 황화론자였으며, 의화단 사건 진압을 위해 출정하는 독일군에게 "자비는 불필요하다"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110][344] 그는 궁정화가 헤르만 크나크푸스에게 ≪황화론≫ 관련 우화 그림을 그리게 했고, 이 그림은 유럽과 미국 등에 배포되어 "황화" 개념을 퍼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346]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동양의 프로이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347]

그는 프랑스를 싫어했고, 영국에 대해서는 반기독교적인 자유주의 국가라고 비판했다. 발칸 반도 국가들을 얕잡아 보았으며,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난쟁이에 비유하기도 했다. 반유대주의적 사상을 가졌지만, 수정의 밤 사건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독일인임을 부끄럽게 생각했다"는 편지를 딸에게 보내기도 했다.

역사가들은 빌헬름 2세의 성격이 그의 통치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토마스 니퍼데이는 그를 "재능이 있지만 피상적이고, 성급하며, 불안정한 인물"로 평가했다. 데이비드 프롬킨은 빌헬름 2세가 영국과 애증 관계를 맺었다고 말한다.[110]

2. 2. 결혼

1881년 2월 27일, 빌헬름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공녀와 결혼하였다.[97] 아우구스테는 빅토리아 여왕의 씨다른언니 페오도라 공비의 손녀로 빌헬름의 외외가쪽으로 육촌이었다. 아우구스테는 빌헬름보다 두 살 위로 볼품없고 평범한 여자였다. 빌헬름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와의 결혼을 희망했지만, 홀슈타인 가문은 독일 제국 건설에 있어 배척받은 가문이었기 때문에 반대가 강했다.[96] 이에 대해 빌헬름은 "이 결혼이 성립한다면 홀슈타인 가문의 호엔촐레른 가문에 대한 악감정도 사라질 것이다. 독일 제국을 위해 이보다 더 기쁜 혼인은 없지 않은가."라고 반론하여, 혼인을 허락받았다고 한다.[97] 1880년 6월 3일에 혼인이 성립되었고, 두 사람은 포츠담의 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90]

빌헬름 2세와 아우구스타 빅토리아는 슬하에 빌헬름, 아이텔 프리드리히, 아달베르트, 아우구스트 빌헬름, 오스카르, 요아힘, 빅토리아 루이제 등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71]

"도나"라는 애칭으로 친근하게 알려진 아우구스타 황후는 빌헬름 2세의 끊임없는 동반자였으며, 그녀가 1921년 4월 11일에 사망한 것은 엄청난 타격이었다. 또한, 그들의 아들 요아힘이 자살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1921년 아우구스테가 죽자, 이듬해 1월 빌헬름은 헤르미네 라이우스 공녀를 도른으로 초대했다. 빌헬름은 35세의 헤르미네에게 매우 매력을 느꼈고,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을 매우 즐겼다. 빌헬름의 군주제 지지자들과 그의 자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1922년 11월 5일 도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34][35] 헤르미네는 늙은 전 황제가 죽을 때까지 그의 곁을 끊임없이 지켰다.

3. 즉위와 통치



1888년 3월 9일, 조부인 독일 황제이자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91세로 붕어하였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황태자가 프리드리히 3세로서 독일 황제이자 프로이센 국왕에 즉위하였고, 빌헬름은 황태자가 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는 즉위 당시 이미 불치병에 걸려 있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6월 15일 재위 99일 만에 붕어하였다.[71][104][105][106][107][108]

황태자 빌헬름이 즉시 즉위하여 빌헬름 2세로서 제3대 독일 황제이자 제9대 프로이센 국왕이 되었다. 당시 29세였다.[105][109] 제국 독일에서는 의회에 비해 황제에게 큰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국정에는 황제의 의지가 크게 반영되었다. 그 때문에 독일 황제 자리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자리"라고 평가되기도 했다.[109][110]

즉위 초 빌헬름 2세는 패기 만만하게 친정을 결의하였다.[111] "호엔촐레른가의 사명"을 저버린 자유주의자인 아버지가 일찍 죽고, 자신이 젊은 나이에 황제가 된 것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112]

빌헬름 2세는 아버지의 붕어 소식을 듣자 즉시 포츠담의 아버지 궁전에 군대를 파병하여 궁전을 포위하고, 어머니 빅토리아를 일시적으로 감금하였다.[80] 이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빌헬름 2세의 정책과 성격을 비판하는 일기를 남겼기 때문이다. 이를 알고 있던 빌헬름 2세는 어머니 빅토리아가 영국이나 시민들에게 그 일기를 흘릴 것이라고 의심했다고 한다.[113][114]

또한 빌헬름 2세는 아버지에 의해 해임된 푸트카머를 내무장관으로 복귀시키려고 했지만,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젊은 군주는 전임자에게 거부당한 자와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여 무산되었다.[115]

젊은 시절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매우 존경했지만, 빌헬름의 특유의 성급함은 곧 그의 제국의 기초를 다진 중요 인물인 "철혈 재상"과 갈등을 빚게 했다. 새 황제는 비스마르크의 신중한 외교 정책에 반대하여 독일의 "태양 아래의 위치"를 보호하기 위해 활기차고 빠른 확장을 선호했다. 게다가 젊은 황제는 할아버지와 달리 통치할 뿐만 아니라 다스리겠다는 결심으로 즉위했다. 제국 헌법이 행정권을 군주에게 부여했지만, 빌헬름 1세는 일상적인 행정을 비스마르크에게 맡기는 것에 만족했다. 빌헬름 2세와 그의 재상 사이의 초기 갈등은 곧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비스마르크는 빌헬름이 지배할 수 있는 경량급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1880년대 후반 빌헬름이 선호하는 정책 목표에 대해 점점 더 무례하게 대했다. 군주와 정치가 사이의 최종 결별은 1890년 초 비스마르크가 광범위한 반사회주의 법을 시행하려는 시도 직후에 발생했다.

빌헬름 2세가 즉위하자마자 헬무트 카를 베른하르트 폰 몰트케(대 몰트케) 백작이 은퇴를 원했다.[108] 빌헬름 2세는 은퇴를 허가하고, 1888년 8월 10일에 참모차장 알프레트 폰 발데르제 백작을 대신하는 참모총장에 임명했다.[219] 발데르제는 즉위 전부터 빌헬름 2세와 친분이 있었던 인물이며,[220] 비스마르크 총리의 실각에도 한몫했다.[221]

그러나 발데르제는 전통적인 프로이센 군인답게 육군 증강론자였기 때문에, 식민지 확장을 위해 해군을 증강하고 싶어했던 빌헬름 2세와 의견 대립을 심화시켰다.[222] 빌헬름 2세는 발데르제를 경질하고, 1891년 1월 31일에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을 참모총장에 임명했다.[223] 빌헬름 2세는 “참모총장은 일종의 서기관으로서 나의 곁에 있으면 된다. 따라서 나에게는 더 젊은 참모총장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224]

슐리펜은 결전병기가 이미 기병에서 속사병기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고, 기병은 원거리 정찰용으로 분류하는 등 군의 현대화를 추진했다.[225]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프로이센 군은 아직 기병 신앙 등의 보수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보불전쟁에서 기구도 기관총도 없는 프로이센 군이 승리했다는 성공 사례도 그것을 부추겼다.[226] 하지만 슐리펜은 빌헬름 2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빌헬름 2세는 기병 돌격을 좋아했기 때문에 시범 훈련에서는 항상 클라이맥스에 기병 돌격이 이루어졌지만, 슐리펜은 이에 항의하지 않았다.[225] 육군 증강을 위한 예산이 해군의 함선 건조비로 전용되어도 항의하지 않았다.[225]

러시아와 프랑스의 동맹 관계가 강화되어 가는 가운데, 슐리펜은 러시아·프랑스와 전쟁이 되었을 경우, 대러시아 동부 전선은 최소한의 병력으로 대처하고, 대프랑스 서부 전선의 우익에 전력을 집중시켜 벨기에의 중립을 침해하여 통과하고, 북프랑스로 쇄도하여 남하하여 파리의 배후에 나가 거기서 스위스 국경까지 북상한다는 슐리펜 계획을 1897년부터 1905년에 걸쳐 작성했다.[227][228][229] 이 계획에 따르면 러시아군이 동프로이센에 침공하든, 영국군이 덴마크에 상륙하든 모두 무시하고, 대프랑스 전에 집중하여 프랑스를 6주 안에 끝내고, 그 후에 다른 적들과 대치하게 된다.[229]

1903년 말에 빌헬름 2세는 참모총장 슐리펜에게 근위 제1보병사단장 헬무트 요한 루트비히 폰 몰트케(소 몰트케) 중장을 참모차장에 임명할 것을 통보했다.[230] 소 몰트케는 대 몰트케의 조카이며, 예전에 삼촌의 부관으로서 종종 궁정에 출입하여 빌헬름 2세에게 “율리우스”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황제와 친밀한 사이였다.[231][232] 이 임명에 군사적 의미는 거의 없고, 빌헬름 2세는 “몰트케”라는 “브랜드 네임”에 매료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233] 슐리펜은 소 몰트케를 평가하지 않았지만, 슐리펜은 구식의 상류층 출신이었기 때문에 황제의 의향에는 침묵으로 따랐다.[231]

1906년에는 소 몰트케를 참모총장에 임명했다. 소 몰트케는 슐리펜 계획의 수정을 시작했다. 마침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을 입수했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군은 로렌(좌익)에 공격을 가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좌익군인 로렌의 제6군, 알자스의 제7군도 공세를 개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우익군은 규모를 다소 축소하게 되었다.[234]

3. 1. 즉위 초

1888년 3월 조부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후두암으로 재위 99일 만에 사망하면서, 빌헬름 2세는 같은 해 6월 15일 29세의 나이로 독일 제국의 제3대 황제(Kaiser)이자 제9대 프로이센 국왕으로 즉위하였다.[105][109] 즉위 초 빌헬름 2세는 패기만만하게 친정을 결의하였다.[111]

빌헬름 2세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의 붕어 소식을 듣자 즉시 포츠담의 아버지 궁전에 군대를 파병하여 궁전을 포위하고, 어머니 빅토리아를 일시적으로 감금하였다.[80]

제국 독일에서는 의회에 비해 황제에게 큰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국정에는 황제의 의지가 크게 반영되었다.[109][110] 빌헬름 2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사적으로 갈등하였는데, 즉위 후 자신의 세계정책에 반하는 정책을 주장하는 비스마르크를 해임하였다. 비스마르크가 퇴임한 이후 독일은 빌헬름 2세의 세계정책을 취하면서 독선적인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하였다.[1][2]

1888년 빌헬름 2세가 즉위할 때까지 독일 정책 결정을 지배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

3. 2. 세계 정책과 외교적 갈등

빌헬름 2세는 1896년 크뢰거 전보(Kruger telegram) 사건에서 트란스발 공화국(Transvaal Republic)의 폴 크뢰거(Paul Kruger) 대통령을 축하하며 영국의 여론을 악화시켰다.[8][9] 또한, 황색 위험(yellow peril)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유럽 국가들의 관심을 끌고자 했으나 실패했다.[9] 독일 남서 아프리카(German South West Africa)(현재 나미비아(Namibia))에서 일어난 원주민 반란은 헤레로와 나마qua족 학살(Herero and Namaqua genocide)로 이어졌으나, 빌헬름 2세는 결국 이를 중단시켰다.[9]

빌헬름 2세의 세계 정책의 대표적인 예로 모로코 사건을 들 수 있다. 1905년 3월 31일, 빌헬름 2세는 모로코 탕헤르를 방문하여 모로코의 영토 보전과 문호 개방을 요구했다.[21] 이는 모로코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에 대한 도전으로, 1906년 알헤시라스 회의를 통해 프랑스의 모로코 진출이 합법적으로 인정되면서 독일은 고립되었다. 1911년 모로코에서 반란이 일어나 프랑스가 출병하자 독일은 군함을 파견하여 위협하였으나, 영국의 지지로 프랑스는 독일에 콩고 북부 지방을 할양하는 대신 모로코에 대한 보호권을 인정받았다.

1904년 영국 풍자 만화. 영국과 프랑스의 앙탕트 코르디알을 풍자하며, 윌헬름 2세를 등지고 마리안느와 함께 걸어가는 존 불을 묘사하고 있다.


오스만 제국에 관심이 많았던 빌헬름 2세는 3B 정책을 추진하여 베를린-비잔티움(이스탄불)-바그다드를 잇는 철도 부설을 추진했다. 1898년 오스만 투르크를 방문하여 철도 부설권을 얻었고, 1903년 바그다드 철도회사를 설립하여 쿠웨이트까지의 철도 부설권과 주변 광산 채굴권 등을 획득했다. 이러한 근동 정책은 영국의 3C 정책, 러시아의 남하 정책, 프랑스의 권익 옹호 문제 등과 대립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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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빌헬름 2세의 오스만 제국 국빈 방문 중 예루살렘에서


1889년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폴리스)을 처음 방문했을 때, 빌헬름 2세는 독일제 소총을 오스만 군대에 판매하는 계약을 성사시켰다.[10] 1898년에는 오스만 제국을 두 번째로 방문하여 살라딘 묘에서 "전 세계에 흩어져 그를 칼리프로 존경하는 3억 명의 무함마드교도들은 독일 황제가 항상 그들의 친구가 될 것"이라고 연설했다.[12] 1917년에는 세 번째로 오스만 제국을 방문했다.[11]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자, 독일, 프랑스,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에 압력을 가하여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게 했다. 이후 독일은 1898년 3월 칭다오의 자오저우 만을 점령했다.

1900년 중국에서 의화단 사건(Boxer Rebellion)이 발생하자, 빌헬름 2세는 독일군에게 훈족(Huns)처럼 무자비하게 싸울 것을 명령하는 훈 연설(Hun speech)을 했다.[13] 이 연설은 독일 외교부에 의해 수정되었으나,[14] "무자비한 공격"과 "포로는 잡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은 연합군의 반독일 선전에 이용되었다.[14][16]

1908년 데일리 텔레그래프 사건(Daily Telegraph Affair)은 빌헬름 2세의 발언이 영국 신문에 보도되면서 외교적 문제를 야기한 사건이다. 빌헬름 2세는 영국과의 우호 관계 증진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발언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이 사건으로 빌헬름 2세는 국내외 정책에 대한 영향력이 줄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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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2세는 영국 해군과 경쟁할 만한 해군 건설을 추진했다. 알프레드 폰 티르피츠를 해군청장으로 임명하여 티르피츠 계획에 따라 해군력을 증강시켰다.[23] 1895년에는 킬 운하를 개통하여 북해와 발트해 사이의 이동 속도를 높였다. 또한, 해군 최고 지휘 체계를 재편성하여 독일 제국 해군 참모부(Marine-Kabinettde)를 설립했다.

3. 3. 국내 정치

빌헬름 2세는 1890년 레오 폰 카프리비를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후임 총리로 임명했다. 카이저는 라이히스타크 개회식에서 노동자 보호 법률의 추가 확대를 가장 시급한 문제로 언급했고, 1891년 노동자 보호법이 통과되어 노동 조건 개선, 여성과 아동 보호, 노동 관계 규제가 이루어졌다.

카프리비는 1894년 클로드비히 폰 호엔로에실링스퓌르스트에게 총리직을 넘겼고, 1900년 호엔로에가 해임된 후에는 베른하르트 폰 뷜로가 총리로 임명되었다.[4] 빌헬름 2세는 이 시기 "신(新) 방침"을 통해 제국 정부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빌헬름 2세 시대에 왕권과 총리 사이의 역학 관계는 이전과 매우 달랐으며, 비스마르크와 같은 노련한 정치가가 아닌 고위 공무원 출신 총리들이 임명되었다.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의 강제 은퇴 이후에도 그의 정책을 비판했지만, 비스마르크는 라이히스타크 내 다수 지지 확보에 실패하여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20세기 초, 빌헬름 2세는 독일 제국 해군 창설에 집중하여 독일을 세계 강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군 수뇌부에게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의 저서 ''해상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읽도록 명령했고, 뷜로와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 총리에게 내정을 맡기는 동안 외교 문제에서 무모한 발언으로 주변국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빌헬름 2세는 예술, 과학, 공교육, 사회복지를 장려했다. 그는 카이저 빌헬름 학회를 후원하여 과학 연구를 지원했으며,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는 그의 압력으로 공학 분야 프로그램을 통합하고 연구비를 지원해야 했다. 또한, 프로이센 중등 교육 제도 개혁을 시도한 근대화론자들을 지지했다. 성 요한 기사단(브란덴부르크 관구)의 수호자로서 독일 의료 발전을 위한 기독교 기사단의 노력을 지원했으며, 이 직책은 1918년 이후에도 호엔촐레른 가문의 수장에게 계승되었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막시밀리안 하르덴이 빌헬름 2세의 측근인 필립 추 에울렌부르크를 포함한 여러 인물들의 동성애 혐의를 보도하면서 스캔들이 발생했다.[20] 이는 재판, 사임, 자살 등으로 이어졌고, 빌헬름 2세는 신경 쇠약을 겪었으며 에울렌부르크와 그의 측근들은 궁정에서 축출되었다. 빌헬름 2세가 억압된 동성애자였다는 견해가 학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고 있으며, 에울렌부르크 사건은 독일 정책의 변화, 군사적 공격성 증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4. 제1차 세계 대전과 퇴위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전쟁 중 빌헬름 2세는 주로 의례적인 임무에 국한되었다고 주장한다. 검열해야 할 무수한 행렬과 수여해야 할 영예가 있었다. "평화 시 자신을 전능하다고 믿었던 그 사람은 전쟁 중 '그림자 황제'가 되어 시야에서 벗어나 방치되고 변방으로 밀려났다."

빌헬름이 리에주의 승자인 오토 폰 에미히 장군과 대화하는 모습; 배경에는 한스 폰 플레센(중앙)과 모리츠 폰 린커(오른쪽) 장군이 보인다.


1917년 1월의 힌덴부르크, 빌헬름, 루덴도르프


빌헬름 2세는 1918년 말 베를린과 기타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에 놀라게 되었는데, 당시 그는 스파에 있는 제국군 사령부에 있었다. 그의 사랑받는 제국 해군 내에서 발생한 반란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독일 혁명 발발 후, 빌헬름 2세는 퇴위할지 말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때까지 그는 황제의 자리를 포기해야 할 가능성을 인정했지만, 여전히 프로이센 국왕 자리는 유지하기를 바랐다. 그는 독일의 3분의 2를 통치하는 통치자로서 새로운 체제에서 여전히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제국 헌법 하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했다. 빌헬름 2세는 프로이센과의 동군연합으로 황제로서 통치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헌법은 제국을 프로이센의 영구적 대통령직 하에 있는 여러 주의 연합으로 정의했다. 따라서 황제의 자리는 프로이센 국왕의 자리와 연결되어 있었고, 빌헬름 2세는 하나의 왕관을 포기하면 다른 왕관도 포기해야 했다.

점점 커지는 혁명적 불안 속에서 군주제를 유지하기를 바라며, 바덴 대공 막스 총리는 1918년 11월 9일 빌헬름 2세의 두 직책 모두에 대한 퇴위를 선포했다. 바덴 대공 막스 자신도 같은 날 후반에 사임할 수밖에 없었는데, 사회민주당 지도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만이 효과적으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같은 날 후반, 에베르트의 국무장관(장관) 중 한 명인 사회민주당원 필리프 샤이데만이 독일을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빌헬름 2세는 루덴도르프의 후임인 빌헬름 그뢰너 장군이 군대 장교와 병사들이 힌덴부르크의 지휘 아래 질서정연하게 복귀할 것이지만 빌헬름 2세의 왕좌를 위해 싸우지는 않을 것이라고 알려준 후에야 이러한 ''기정사실''을 받아들였다. 군주제의 마지막이자 가장 강력한 지지는 무너졌고, 마침내 평생 군주제 지지자였던 힌덴부르크마저도 장군들에게 의견을 물어본 후 황제에게 왕관을 포기하라고 조언해야 했다. 11월 10일, 빌헬름 2세는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중립국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1919년 초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제227조는 빌헬름 2세를 "국제적 도덕과 조약의 신성에 대한 최고의 범죄"로 기소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규정했지만, 네덜란드 정부는 그를 인도 거부했다. 조지 5세는 그의 사촌을 "역사상 가장 큰 범죄자"로 여겼지만,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수상의 "카이저를 교수형에 처하자"는 제안에는 반대했다. 영국에서 기소에 대한 열의는 거의 없었다. 1920년 1월 1일, 런던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영국이 "전 카이저의 재판을 위해 네덜란드가 인도를 거부하는 것을 환영할 것"이라고 밝혔고, 이것이 외교 경로를 통해 네덜란드 정부에 전달되었다는 암시가 있었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빌헬름 2세를 기소하면 국제 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평화를 잃게 될 것이라는 주장으로 인도에 반대했다.

빌헬름 2세는 처음 아메롱겐에 정착했고, 11월 28일에는 프로이센과 제국의 왕좌에서 모두 늦은 퇴위 선언을 발표하여 호엔촐레른 가문의 500년간의 프로이센과 그 전신인 브란덴부르크 통치를 공식적으로 끝맺었다. 그는 마침내 두 왕관을 모두 영원히 잃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프로이센 왕위와 그에 관련된 독일 제국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또한 프로이센과 제국 모두에서 그의 군인들과 관리들을 그의 충성 맹세에서 해방시켰다. 그는 도른 시의 시골집인 후이스 도른을 구입하여 1920년 5월 15일에 이사했다. 이곳은 그의 여생 동안 그의 집이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빌헬름 2세가 포츠담의 노이에 파라스에서 23량의 철도 화차의 가구, 27량의 온갖 물건이 담긴 포장, 자동차를 실은 1량과 보트를 실은 1량을 제거하도록 허용했다.

4. 1. 독일의 참전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보스니아사라예보를 방문했을 때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저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사라예보 사건).[236][237] 이 사건으로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였고, 독일은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오스트리아 측으로 전쟁에 참가하였다.[240][241]

빌헬름 2세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친구였으며, 그의 암살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237] 1914년 7월 5일, 빌헬름 2세는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러시아가 개입할 경우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할 것을 약속했고,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결심했다면 지금이 가장 유리한 상황이라고 말했다.[237][238] 이튿날인 7월 6일에는 총리 베트만도 오스트리아에 지원을 약속하는 “백지 위임장”을 주었다.[239]

7월 31일 러시아가 동원령을 발령하자, 독일도 8월 1일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241] 같은 날 빌헬름 2세는 국민들에게 “나는 어떤 당파의 존재도 모른다. 있는 것은 오직 독일인뿐이다”라고 연설하며, 궐기일치를 요구했다.[242][243] 8월 3일에는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에도 선전포고를 했다.[241] 영국은 독일에게 벨기에의 중립을 지킬 것을 요구했지만, “슐리펜 계획”에 매달리고 있던 독일군부로서는 벨기에를 침공하지 않을 수 없었다.[244] 독일은 8월 4일 벨기에 영토를 침공했고, 이에 영국은 같은 날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240]

빌헬름 2세 등 독일 지도부가 개전을 서두른 듯한 행동을 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오스트리아는 독일에게 남은 마지막 동맹국이었고, 오스트리아의 동요는 독일에게 사활 문제였다.[235] 또한 영국은 역사적으로 동유럽에 거의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적어도 영국은 즉각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239] 게다가 “유럽 반동의 보루”인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이라면 제국 의회 제1당인 독일 사회민주당(SPD)으로부터 전쟁 지지를 기대할 수 있었다.[245] 그리고 독일 군부가 1916년이나 1917년에는 독일군의 러시아군에 대한 군사적 우위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점도 주요 원인이었다.[237]

전쟁 중 빌헬름 2세는 주로 의례적인 임무에 국한되었다. 검열해야 할 무수한 행렬과 수여해야 할 영예가 있었다. "평화 시 자신을 전능하다고 믿었던 그 사람은 전쟁 중 '그림자 황제'가 되어 시야에서 벗어나 방치되고 변방으로 밀려났다."

4. 2. 전쟁의 경과와 군부 독재

1914년 8월 1일, 빌헬름 2세는 대규모 군중 앞에서 전쟁 연설을 했다.[24] 그는 독일의 승리를 예측하며, "신의 도움, 독일군과 해군의 용기, 그리고 위험의 시간 동안 독일 국민의 꺼지지 않는 일치된 의지로 우리의 대의가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26] 그러나 전쟁 중 빌헬름 2세의 역할은 점차 의례적인 임무에 국한되었다.[24] "평화 시 자신을 전능하다고 믿었던 그 사람은 전쟁 중 '그림자 황제'가 되어 시야에서 벗어나 방치되고 변방으로 밀려났다."

슐리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1916년까지 독일은 사실상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의 군사 독재하에 놓였다. 빌헬름 2세는 현실과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 점차 고립되었지만, 여전히 정치적 임명에 대한 최고 권한을 유지했다. 그는 1914년 9월 헬무트 폰 몰트케 대장의 해임과 에리히 폰 팔켄하인 장군으로의 교체를 승인했다. 1917년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총리의 해임을 요청했고, 빌헬름 2세는 그들의 추천을 받아들여 게오르크 미하엘리스를 후임 총리로 임명했다.

1917년 7월, 빌헬름 2세는 사촌인 조지 5세가 영국 왕실의 이름을 윈저로 변경했다는 소식을 듣고,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즐거운 아낙네들''을 볼 계획이라고 말했다.[27] 1918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전쟁 종식 이전에 군주제를 타도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빌헬름 2세의 지지 기반은 완전히 무너졌다.

슐리펜 계획”에 따라 독일군은 서부전선을 주전장으로 삼아 벨기에를 통과하여 북프랑스로 진격했지만, 마른 전투에서 연합군에게 저지당했다.[248] 빌헬름 2세는 몰트케를 해임하고 에리히 폰 팔켄하인을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249] 1914년 크리스마스까지 서부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참호전 등의 소모전이 이어졌다.[251]

동부전선에서도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가 지휘하는 독일군이 고전했다. 빌헬름 2세는 동부전선 증강파와 서부전선 증강파의 논쟁을 지켜보다가 1915년 7월 포즈난에서 열린 칙령 회의에서 팔켄하인을 지지했다.[255]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시작했지만, 중립국 미국의 반발을 샀다.[256][257] 빌헬름 2세는 총리 베트만의 건의를 받아들여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주장하던 해군장관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를 해임했다.[259][260]

1915년 4월, 독일군은 이프르에서 처음으로 독가스를 사용했고, 이후 양 진영에서 독가스 무기 사용이 일상화되었다.[259][263]

1916년 2월, 팔켄하인은 베르됭 전투를 시작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루마니아가 연합국 측에 참전하면서 경질되었다.[265] 빌헬름 2세는 힌덴부르크를 참모총장에, 루덴도르프를 참모차장에 임명했다.[265] 이후 독일의 전쟁은 실질적으로 루덴도르프에 의해 지휘되었고, "루덴도르프 독재" 시대가 시작되었다.[267][268]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정이 붕괴되자 독일 내에서도 강화 여론이 높아졌다. 빌헬름 2세는 부활절 칙서에서 프로이센 선거법 개혁을 약속했다.[274]

1917년 2월, 독일 외무장관의 치머만 전보 사건과 무제한 잠수함 작전 재개로 미국이 참전했다. 베트만 총리는 해임되고, 미하엘리스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283][284] 미하엘리스는 육군 최고 사령부의 대변인 역할을 했고, 군사 독재 체제가 완성되었다.[275]

미하엘리스가 불신임을 받자, 빌헬름 2세는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을 후임 총리로 임명했다.[285][286] 1918년 1월, 독일 각지에서 반전 파업이 발생했지만, 군부와 정부는 강경하게 대응했다.[289]

동부 전선에서 승리한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1918년 춘계 공세를 감행했지만, 제2차 마른 전투에서 패배하고 주도권을 빼앗겼다.[295][296] 1918년 8월 8일, 아미앵 전투(de)에서 독일군 전선이 붕괴되자 루덴도르프는 이 날을 "독일 육군 암흑의 날"이라고 불렀다.[297][298][299]

4. 3. 독일 혁명과 퇴위

1916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루덴도르프가 군사 독재를 시작한 이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실질적인 권한을 잃고 명목상의 군 통수권자로 전락했다.[350] 왕권신수설을 신봉했던 그는 패전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퇴위를 거부했다.[350]

1918년부터 독일 내에서 반전 시위가 확산되었고, 11월에는 킬 군항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독일 혁명으로 이어져 1919년 1월 9일 시민들이 베를린을 장악했다.[350] 빌헬름 2세는 독일 황제직에서는 퇴위하고 프로이센 국왕으로만 재위하는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이마저도 거부당했다.[350] 결국 1918년 11월 9일 수상 막시밀리안이 황제의 퇴위를 선언했고,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했다.[350]

1918년 9월 1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9월 25일에는 불가리아 왕국이 연합국에 휴전을 요청했다.[300] 독일군부 내에서도 병사들의 항복과 전의 상실 보고가 잇따랐다.[301] 9월 28일,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윌슨 미국 대통령의 십사개조 평화 원칙을 수용하여 휴전 협정을 맺고, 의회주의에 기반한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통첩을 정부에 보냈다.[288][300][302] 빌헬름 2세는 군부와 외무장관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의회 정치에 반대했던 헤르틀링은 총리직에서 물러났다.[300][303]

10월 3일, 바덴 대공 막시밀리안이 후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막시밀리안은 윌슨과 휴전 협상을 요청했으나, 윌슨은 10월 23일 회답에서 「군국주의와 왕조적 전제주의의 제거」를 요구했다.[306] 독일 국민 사이에서는 빌헬름 2세의 퇴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306] 막시밀리안은 루덴도르프의 해임을 빌헬름 2세에게 요청했고, 10월 26일 루덴도르프는 해임되었다.[307][308] 후임 참모차장에는 빌헬름 그레너가 취임했다.[306][309]

10월 28일 헌법 개정이 공포되어 의회주의에 기반한 입헌 군주제가 도입되었지만, 황제 권력은 여전히 유지될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비판을 받았다.[310] 빌헬름 2세는 10월 29일 베를린을 떠나 벨기에 스파에 있는 대본영으로 이동했다.[311]

10월 말 빌헬름스하펜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11월 4일 킬에서도 수병과 노동자들이 합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11월 7일 바이에른 왕국에서 쿠르트 아이스너를 중심으로 혁명이 발생하여 비텔스바흐 왕가가 멸망했다.[316]

11월 7일 사회민주당은 막시밀리안에게 황제와 황태자의 퇴위를 요구하며, 이것이 실현되지 않으면 정권에서 이탈하겠다고 통보했다.[318][319] 그러나 빌헬름 2세는 퇴위 요구를 거부했다.[311]

막시밀리안은 11월 9일 독단으로 빌헬름 2세의 퇴위를 선언했다.[322] 빌헬름 2세는 격분했지만, 그레너와 힌덴부르크의 권고에 따라 결국 망명을 결심했다.[324] 11월 10일 새벽, 빌헬름 2세는 특별 열차로 스파 대본영을 떠나 네덜란드로 망명했다.[325]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 아메롱겐에서 1918년 11월 28일 뒤늦게 퇴위 조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호엔촐레른 가의 프로이센 지배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350] 퇴위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용문|짐은 이 문서를 통해 프로이센 왕위에 대한 향후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이로써 이와 연결된 독일 황위에 대한 권리도 포기한다.[...]

아메롱겐에서, 1918년 11월 28일|빌헬름[350]}}

5. 퇴위 이후의 삶

1921년 4월 11일,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황후가 서거했다.[84] 같은 해 11월 5일, 빌헬름 2세는 형제 계열 로이스 공녀 헬미네와 재혼했다.[84] 빌헬름 2세는 63세, 헬미네는 35세의 미망인이었고, 이 재혼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334]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 망명 중에도 항상 복위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독일의 왕당파우익 세력에 대해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치스 당에도 호의를 품고 있었으며, 독일에 남아있던 황태자 빌헬름을 나치 당에 입당시켰다. 1931년에는 헤르만 괴링이 네덜란드를 방문하여 빌헬름 2세를 면회했다.[71]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반(反)군주주의자란 것을 알고는, 나치스에 대한 지원을 소극적으로 했다.

1930년에는 독일 본국에 있던 제4황자 아우구스트가 NSDAP(나치)에 입당했다.[71]

1926년 1월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외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주 네덜란드 독일 대사는 “황제는 정치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말하면서도 현재의 생활 상태를 개선하고 싶다는 희망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황제의 현황은 매우 편안하며, 심신이 평온합니다.”라고 적고 있다.[336]

1934년에 사망한 힌덴부르크는 유언으로 빌헬름 2세의 손자인 루이 페르디난트를 맞이한 제정 복고를 명했지만, 총리가 된 히틀러는 이 유언을 뭉갰다고 한다.

네덜란드 정부는 정치 활동 중단을 조건으로 빌헬름 2세의 수용을 승낙했고, 연합국은 베르사유 조약 제227조에서 “국제 도의와 조약에 대한 최고의 죄를 저질렀다”고 하여 전 황제로서의 빌헬름 2세의 기소를 결정했다.[329] 영국 정부는 강화 회의 이전부터 네덜란드 정부에 빌헬름 2세의 신병 인도를 계속 요구했지만, 네덜란드 정부는 빌헬름 2세를 구속하지 않았고, 또 그가 인도에 관한 네덜란드 국내법을 위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도할 수 없다고 하여, 1920년 1월 21일에 공식적으로 거부 통고를 했다.[331] 연합국은 거듭 인도 요구를 하지 않았고, 결석 재판을 하지도 않았다.[331]

이후 빌헬름 2세는 죽을 때까지 23년간 네덜란드에서 보내게 되었다. 소수의 신하를 거느리면서 유트레흐트주도른의 성관에서 귀족으로 안락한 여생을 보내며, 과거의 신하들을 꾸짖으면서 취미로 나무를 베며 지냈다. 1922년 출판한 자신의 회고록 1권에서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데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며, 특히 외교 정책 문제와 관련하여 재위 기간 동안 자신의 행동을 변호했다. 남은 20년 동안 그는 종종 유명한 손님들을 접대하며 유럽의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계속 접했다. 그는 수염을 기르고 유명한 콧수염을 처지게 하여 사촌인 조지 5세 국왕과 니콜라이 2세와 매우 유사한 스타일을 채택했다. 또한 네덜란드어를 배웠다. 코르푸 아킬레이온에 거주하는 동안 빌헬름 2세는 고고학에 대한 애정을 키워 코르푸의 아르테미스 신전 유적지를 발굴했으며, 이 열정은 망명 생활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1898년 암살당한 엘리자베트 황후의 전 거처를 구입했다. 또한 심심할 때면 웅장한 건물과 전함의 설계도를 그리기도 했다. 망명 생활에서 빌헬름 2세의 가장 큰 열정 중 하나는 사냥이었고, 그는 수천 마리의 동물, 짐승과 새를 사냥했다. 그의 시간의 상당 부분은 나무를 패는 데 쓰였고, 도른에 머무는 동안 수천 그루의 나무가 베어졌습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의 나치 독일의 전쟁 수행에 전면적으로 찬성했다. 폴란드 침공에 대해 빌헬름 2세는 “이번 전쟁은 놀라운 것이며, 전통적인 프로이센 정신으로 수행되었다”고 칭찬했다.[192] 1940년 5월, 자신의 망명지인 네덜란드에 독일군이 침공했을 때, 영국의 처칠로부터 빌헬름 2세에게 영국으로의 망명 권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거절하고 네덜란드에 남아 독일군의 보호를 받았다. 또한 같은 해, 과거 그의 독일군이 달성할 수 없었던 파리 함락을 히틀러의 독일군이 달성한 것을 보고, 히틀러에게 축전을 보냈다.[71][192][323] 1940년 가을의 편지에서는 “지금 활약하고 있는 독일군 장군들은 과거 내 제자였던 자들이다. 어떤 자는 소위로, 어떤 자는 대위로, 어떤 자는 소령으로 나의 곁에서 세계 대전을 싸웠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84]

독소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41년6월 4일, 빌헬름 2세는 폐색전증으로 도른에서 사망했다.[84][339] 히틀러의 명령으로 독일군에 의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71] 빌헬름 2세는 먼저 도른 시문 근처에 있는 예배당에 매장되었고, 그 후 유언에 따라 사후 도른 저택 정원에 건설된 묘소에 개장되었다.

5. 1. 망명 생활

1921년 4월 11일,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황후가 서거했다.[84] 같은 해 1922년 11월 5일, 빌헬름 2세는 형제 계열 로이스 공녀 헬미네와 재혼했다.[84] 빌헬름 2세는 63세, 헬미네는 35세의 미망인이었고, 이 재혼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334]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 망명 중에도 항상 복위의 희망을 품고 있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독일의 왕당파우익 세력에 대해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335] 나치스 당에도 호의를 품고 있었으며, 독일에 남아있던 황태자 빌헬름을 나치 당에 입당시켰다. 1931년에는 헤르만 괴링이 네덜란드를 방문하여 빌헬름 2세를 면회했다.[71]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반(反)군주주의자란 것을 알고는, 나치스에 대한 지원을 소극적으로 했다.

1930년에는 독일 본국에 있던 제4황자 아우구스트가 NSDAP(나치)에 입당했다.[71]

1926년 1월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외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주 네덜란드 독일 대사는 “황제는 정치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말하면서도 현재의 생활 상태를 개선하고 싶다는 희망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황제의 현황은 매우 편안하며, 심신이 평온합니다.”라고 적고 있다.[336]

1934년에 사망한 힌덴부르크는 유언으로 빌헬름 2세의 손자인 루이 페르디난트를 맞이한 제정 복고를 명했지만, 총리가 된 히틀러는 이 유언을 뭉갰다고 한다.

네덜란드 정부는 정치 활동 중단을 조건으로 빌헬름 2세의 수용을 승낙했고, 연합국은 베르사유 조약 제227조에서 “국제 도의와 조약에 대한 최고의 죄를 저질렀다”고 하여 전 황제로서의 빌헬름 2세의 기소를 결정했다.[329] 영국 정부는 강화 회의 이전부터 네덜란드 정부에 빌헬름 2세의 신병 인도를 계속 요구했지만, 네덜란드 정부는 빌헬름 2세를 구속하지 않았고, 또 그가 인도에 관한 네덜란드 국내법을 위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도할 수 없다고 하여, 1920년 1월 21일에 공식적으로 거부 통고를 했다.[331] 연합국은 거듭 인도 요구를 하지 않았고, 결석 재판을 하지도 않았다.[331]

이후 빌헬름 2세는 죽을 때까지 23년간 네덜란드에서 보내게 되었다. 소수의 신하를 거느리면서 유트레흐트주도른의 성관에서 귀족으로 안락한 여생을 보내며, 과거의 신하들을 꾸짖으면서 취미로 나무를 베며 지냈다.[84] 1922년 출판한 자신의 회고록 1권에서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데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며, 특히 외교 정책 문제와 관련하여 재위 기간 동안 자신의 행동을 변호했다. 남은 20년 동안 그는 종종 유명한 손님들을 접대하며 유럽의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계속 접했다. 그는 수염을 기르고 유명한 콧수염을 처지게 하여 사촌인 조지 5세 국왕과 니콜라이 2세와 매우 유사한 스타일을 채택했다. 또한 네덜란드어를 배웠다.[84] 코르푸 아킬레이온에 거주하는 동안 빌헬름 2세는 고고학에 대한 애정을 키워 코르푸의 아르테미스 신전 유적지를 발굴했으며, 이 열정은 망명 생활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1898년 암살당한 엘리자베트 황후의 전 거처를 구입했다. 또한 심심할 때면 웅장한 건물과 전함의 설계도를 그리기도 했다. 망명 생활에서 빌헬름 2세의 가장 큰 열정 중 하나는 사냥이었고, 그는 수천 마리의 동물, 짐승과 새를 사냥했다. 그의 시간의 상당 부분은 나무를 패는 데 쓰였고, 도른에 머무는 동안 수천 그루의 나무가 베어졌습니다.[84]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의 나치 독일의 전쟁 수행에 전면적으로 찬성했다. 폴란드 침공에 대해 빌헬름 2세는 “이번 전쟁은 놀라운 것이며, 전통적인 프로이센 정신으로 수행되었다”고 칭찬했다.[192] 1940년 5월, 자신의 망명지인 네덜란드에 독일군이 침공했을 때, 영국의 처칠로부터 빌헬름 2세에게 영국으로의 망명 권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거절하고 네덜란드에 남아 독일군의 보호를 받았다. 또한 같은 해, 과거 그의 독일군이 달성할 수 없었던 파리 함락을 히틀러의 독일군이 달성한 것을 보고, 히틀러에게 축전을 보냈다.[71][192][323] 1940년 가을의 편지에서는 “지금 활약하고 있는 독일군 장군들은 과거 내 제자였던 자들이다. 어떤 자는 소위로, 어떤 자는 대위로, 어떤 자는 소령으로 나의 곁에서 세계 대전을 싸웠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84]

독소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41년6월 4일, 빌헬름 2세는 폐색전증으로 도른에서 '''사망'''했다.[84][339] 히틀러의 명령으로 독일군에 의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71] 빌헬름 2세는 먼저 도른 시문 근처에 있는 예배당에 매장되었고, 그 후 유언에 따라 사후 도른 저택 정원에 건설된 묘소에 개장되었다.

5. 2. 나치즘에 대한 태도

1921년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황후가 사망한 후,[84] 1922년 빌헬름 2세는 형제 계열 로이스 공녀 헬미네와 재혼했다.[84]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 망명 중에도 복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독일의 왕당파우익 세력에 대해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335]

1930년 제4황자 아우구스트가 나치당(NSDAP)에 입당했고,[71] 1931년에는 헤르만 괴링이 네덜란드를 방문하여 빌헬름 2세를 만났다.[71] 빌헬름 2세는 나치스 당에 호의를 품고 있었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반(反)군주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나치스에 대한 지원을 소극적으로 하였다.[71] 1930년대 초, 빌헬름 2세는 나치당의 성공이 호엔촐레른 왕가의 복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를 바랐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 출신이었던 히틀러는 그에게 경멸감을 느꼈고, 청원은 무시되었다. 긴 칼의 밤 사건과 수정의 밤 사건을 통해, 빌헬름은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불신을 갖게되었다.[31]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빌헬름 2세는 나치 독일의 전쟁 수행을 전면적으로 지지했다. 폴란드 침공과 파리 함락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히틀러에게 축전을 보냈다.[71][192][323] 1940년 5월,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군에 점령될 위기에 처하자, 윈스턴 처칠은 빌헬름 2세에게 영국으로의 망명을 권유했으나, 빌헬름 2세는 이를 거절하고 네덜란드에 남아 독일군의 보호를 받았다.[71]

빌헬름 2세는 유럽합중국 건설과 같은 음모론을 믿었으며, 유대인과 프리메이슨에 대한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32] 독소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41년6월 4일, 빌헬름 2세는 폐색전증으로 도른에서 '''사망'''했다.[84][339] 히틀러의 명령으로 독일군에 의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71]

5. 3. 죽음

빌헬름 2세는 1941년 6월 4일 네덜란드 도른에서 82세의 나이로 폐색전증으로 사망했다.[84][339] 그의 죽음은 소련 침공 몇 주 전이었다. 개인적으로 군주제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황제의 시신을 베를린으로 옮겨 국장을 치르기를 원했다. 히틀러는 자신이 왕위 계승자 역할을 하는 국장이 선전에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군주제가 복고되지 않는 한 자신의 시신을 독일로 돌려보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는 마지못해 존중되었다.

나치 점령 당국은 수백 명이 참석한 소규모 군사 장례식을 주선했다. 조문객에는 옛 제국 기병대 유니폼을 완전히 착용한 원수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제1차 세계 대전 해군 정보국 현장 요원 제독 빌헬름 카나리스, 콜로넬 장군 쿠르트 하제, 제1차 세계 대전의 비행 에이스 출신으로 네덜란드의 국방군 사령관을 역임했던 장군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센, 그리고 네덜란드의 총독 아르투르 자이스-인쿠아르트를 포함한 몇몇 다른 군사 고문들이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사진작가가 촬영한 장례식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장례식에서 하켄크로이츠와 나치 당의 상징물을 전시하지 말 것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되었다.

빌헬름 2세는 후이스 도른 부지에 있는 능에 묻혔고, 그곳은 이후 독일 군주제 지지자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들은 매년 그의 기일마다 그곳에 모여 마지막 독일 황제에게 경의를 표한다.
후이스 도른의 빌헬름 묘소

6. 유산 및 평가

빌헬름 2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크게 세 가지 경향으로 나뉜다. 첫째, 궁정 사가들은 그를 순교자이자 영웅으로 묘사하며 그의 회고록을 대체로 수용했다. 둘째, 빌헬름 2세가 통치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하고 무모하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했다. 셋째, 1950년대 이후 학자들은 객관적인 묘사를 시도했다.

1913년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빌헬름 2세 즉위 25주년을 기념하며 그를 "최고의 평화 창조자"라고 칭송했다.[33] 그러나 1950년대 후반까지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빌헬름 2세 시대의 독일을 거의 절대 군주제로 묘사했다. 이는 독일 공무원과 관리들의 의도적인 속임수 때문이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테오도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은 폰 뷜로 총리(Chancellor von Bülow)의 메시지를 카이저의 메시지로 오인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역사가 존 C.G. 뢰를(John C. G. Röhl)이 빌헬름 2세를 독일 제국의 몰락을 이해하는 핵심 인물로 묘사하기도 한다.

빌헬름 2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원흉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는 연합국의 역사관에 기반한 평가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객관적인 연구 결과, 과거 빌헬름 2세의 책임으로 여겨졌던 사건들(예: 포츠담 어전회의, 탕헤르 방문)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프리츠 피셔의 연구 이후, 빌헬름 2세뿐만 아니라 독일 지도층 전체가 전쟁에 책임이 있다는 인식이 역사학계의 공통된 견해가 되고 있다.[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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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 기타 빌헬름 2세의 퇴위 선언문 1918-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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